[세상사는 이야기] 진료실에서 만나는 세상 이야기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옛말
결국 우리 사회의 목표는
아이 키우기 좋은 세상 아닐까




대부분 의사들이 그렇겠지만 나와 같은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은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도 하면서 진료실에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아이가 이번에 어느 학교에 갔다든지, 어린이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 사연, 동생이 태어난 이야기 등 집안의 대소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제복을 입은 채로 열이 나는 아이를 급하게 데리고 온 경찰관 엄마도 있고, 코로나 유행 시기에 택배 헬멧을 쓴 채로 아들 약을 타러 온 아빠도 있었다.

보호자가 아이 상태를 설명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의학용어를 섞어 쓰다가 나에게 의사임을 들켜서 서로 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함께 웃고 넘어갈 만한 소식들만 나누면 좋으련만, 때때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직접 하기도 하고, 동료 의사들로부터 전해 듣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한 아이를 진료하는 중에 문득 그 아이의 아픈 누나가 생각나서 안부를 물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부모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둘째만 데리고 진료를 보러 온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어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은 이야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더 자세히 묻지 못했다.

한번은 다른 진료실에 엄마와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진료를 보고 나가면서 엄마가 동료 의사 선생님에게 "앞으로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가셨는데, 얼마 후 할머니 혼자 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사이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주었다 한다. 아이가 다 클 때까지 선생님이 이 병원에 계시면서 계속 우리 아이를 잘 진료해주셨으면 하는 게 엄마의 바람이었단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주인공 꼬마 유우지의 엄마가 자기가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동네 빵집에 가서 유우지가 다 클 때까지 해마다 아이 생일에 케이크를 배달해 달라고 미리 주문을 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런 일은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 이 작은 진료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사연들을 접하다 보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오늘 내가 이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의 결론은 이 아이는 이 가정의 행복의 근원이고 아이를 잘 치료해서 가정이 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아이가 아프면 밤을 새운 엄마·아빠가 지친 몸, 걱정하는 마음으로 직장에 간다 한들 일이 손에 잡힐 턱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분들이 맡은 일이 최상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게 되고, 그렇게 연결된 사회나 집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나름 중요한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뇌피셜이다.

요즘 고령화 저출산 사회니, 지방 소멸이니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결국 최종점은 아이를 키우기 좋고 밝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가 크는 동안 잘 놀고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아이가 아프면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최근 대통령께서 직접 나서서 아픈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게끔 하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옛 속담에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이야말로 이해관계를 가리지 말고 아이 한 명을 우리 사회의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키우는 데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정성관 우리아이들병원 이사장]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