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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나"

입력 : 
2023-05-26 17: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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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소아과 의사 현실 다룬
20년 전 만화에서 나온 대사
부모 기대 수준 더 높아졌고
그에 맞는 지원책은 태부족
사명감에만 기댈 수는 없어
사진설명
아픈 아이 진료를 받기 위해 오픈런을 하고, 야간이나 휴일에 소아 응급진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 헤맸다는 사연들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유례없는 3~4월 소아청소년과 오픈런이라니, 이는 비단 소아를 진료할 수 있는 전문의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인 위생 수준이 올라가면서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면역항체를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 갑자기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들이 퍼진 이유도 있었다.

선배들에게서 예전에는 혼자 하루 600~700명의 아이를 진료했다는 무용담을 전설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요즘은 이렇게 진료하고자 하는 의사도 없을뿐더러, 아마도 이런 병원을 찾고 싶은 보호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이들을 진료하던 그 시절에는 왜 소아청소년과 오픈런이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다가 최근에야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첫째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다음으로는 훨씬 더 많은 양의 건강 관련 정보를 접하고 있고, 마지막으로는 진료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호자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원인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감염 경로도 알고 싶고, 처방해준 약이 어떤 효능과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질병의 대략적인 경과도 예측하고 싶고, 가정에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알고 싶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병원이라면 대기가 없어도 가기를 꺼릴 것이다.

우리 병원 의사들 중에도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은 보호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도록 화장실 가는 것마저 참으면서 부리나케 환자를 보는 원장님이 계신가 하면, 병원을 찾은 모든 아이들을 진료할 순 없지만 한명 한명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꼼꼼하게 진료하는 원장님도 계신다. 모든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환아 수와 상관없이 꼼꼼하게만 봐주면 병원은 적자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소아청소년과가 처한 현실이다. 어느 스타일의 진료가 '더 옳다'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보호자 입장에서 보면 내 아이만큼은 대기시간이 길더라도 자기 아이처럼 봐주는 원장님께 진료를 받고 싶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조금 더 실력 있고 성의 있게 진료하는 의사에게 접수하기 위해 남들보다 빠르게 병원을 찾는 이른바 오픈런 현상이 발생한다.

지금은 인력도, 재원도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다. 의원부터 병원들까지 각 의료기관이 비슷한 진료를 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보다 역할을 분담하여 맡은 역할에만 충실해도 운영이 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 선택과 집중의 보편적 원리를 소아 진료체계에도 적용해야 할 때이다.

우리나라보다 저출산 위기를 먼저 겪은 일본의 20년 전을 그린 한 만화를 보면 당시의 의료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아과 실습을 도는 주인공 사이토에게 선배 소아과 의사가 해주는 조언이다. 소아과는 어른 환자의 몇 배나 되는 수고와 인건비가 들어가는데 그에 대한 지원책은 부족해서 항상 적자라고. 부모는 자신이 아픈 건 참고 넘어가도 아이가 아프면 내버려 두지 못하니까 의사를 힘들게 한다고. 하지만 부모가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의사가 부모와 싸우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아이니깐 부모와 싸우지 말라고. 병원과 소아과 의사의 어려운 현실을 얘기하는 중에 그래도 소아과 의사를 하는 이유에 대해 사이토가 물으니 선배 의사는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나"라고 답한다.

나는 내가 좋아서 하고 있지만 과연 현재의 의료상황에서 의사 후배들에게 "네가 안 하면 이 일을 누가 하겠나"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정성관 우리아이들병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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